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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개봉한 영화 유령은 단순히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스파이 액션물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그 안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고도 단단하게 그려낸 영화입니다. 특히나 ‘유령’이라는 상징적 단어를 제목으로 내세운 점은,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인물들의 존재 방식과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장치였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침묵하는 자들이 어떻게 진실을 감추고, 때로는 그 침묵이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는지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상보다 훨씬 깊고 단단한 여운이 남았습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공간, 고립된 호텔에서의 심리전
유령은 1933년 경성, 조선총독 암살을 시도한 항일 무장 조직 ‘흑색단’의 스파이를 색출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총독부는 ‘유령’이라 불리는 조직의 첩자가 내부에 있다고 의심하고, 수상한 인물 다섯 명을 외딴 호텔에 감금합니다. 이때부터 영화는 누가 ‘유령’인지 알아내려는 추리극 형식으로 전개되는데, 단지 범인을 찾는 전형적인 스릴러가 아니라 인물 간의 눈빛과 말, 침묵과 표정이 오가는 아주 밀도 높은 심리전으로 그려집니다.
저는 이 설정이 너무 좋았습니다. 공간을 좁히고, 인물의 수를 제한함으로써 관객은 자연스럽게 집중하게 되고, 그들의 감정 변화와 숨겨진 본성을 놓치지 않기 위해 더 몰입하게 됩니다. 특히 각 인물이 말하는 순간보다 침묵하는 순간들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데, 이 연출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진실'은 결코 쉽게 말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여성이 주도하는 스파이극, 강인함과 내면을 동시에 담다
유령의 또 다른 강점은 여성 캐릭터가 중심이라는 점입니다. 박차경(이하늬 분)은 총독부 암호문을 기록하는 비서로, 자신을 향한 의심에도 끝까지 냉정함을 유지합니다. 유리코(박소담 분)는 정무총감의 비서로, 겉보기엔 철저하게 일본 제국에 충성하는 듯하지만 속내는 쉽게 읽히지 않는 인물입니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에는 서로를 감시하는 적처럼 그려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감정의 틈이 보이고, 결국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됩니다.
저는 이 두 여성 캐릭터를 통해 여성 서사가 어떻게 스파이물에 녹아들 수 있는지를 확인했습니다. 단순한 ‘여성도 싸운다’는 차원이 아니라, 여성 특유의 직감과 감정, 그리고 생존 전략이 이 이야기의 긴장감을 더욱 증폭시킨다고 느꼈습니다. 특히 박소담 배우의 유리코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관객으로 하여금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캐릭터였고, 그 복합성이 영화의 핵심이었습니다.
시대극의 외피를 두른 스파이 장르의 새로운 변주
일제강점기는 한국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다뤄져온 배경입니다. 하지만 유령은 단지 그 시대를 묘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내면, 특히 '조용한 저항'에 초점을 맞춥니다. ‘소리치지 않아도 들리는 항거’가 이 영화의 정조라고 느껴졌습니다. 영화 내내 거대한 전투나 폭파 장면이 없음에도, 한 마디 대사나 시선의 교차, 타자기를 두드리는 손의 떨림이 훨씬 큰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무라야마 쥰지 역의 설경구 배우는 총독부의 통신과 감독관으로 등장하는데, 그는 조선인임에도 일본 제국의 일원으로 살아갑니다. 그 인물 안에 느껴지는 분열과 모순은 단순히 적으로만 보기엔 복잡한 감정을 유발합니다. 설경구는 그런 쥰지를 묵직한 연기로 표현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이 인물을 쉽게 재단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속도보다 의미를 택한 연출, 긴 호흡이 만드는 서늘한 긴장
류승완 감독의 전작들과는 달리 유령은 액션보다 감정과 분위기에 집중합니다. 전개는 느릿하고, 때로는 답답할 정도로 인물의 움직임을 천천히 따라가지만, 그 느린 속도가 오히려 이 영화의 매력이기도 했습니다. 화려한 총격전보다 더 무서운 건 말 한마디 없는 방에서의 침묵이었고, 손을 떨며 건네는 커피잔 하나가 모든 감정을 뒤흔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연출 방식이 영화의 주제와도 잘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이 영화가 지루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만약 이 주제와 시대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싶은 관객이라면, 유령의 이러한 정적인 전개가 훨씬 큰 울림을 줄 것입니다. 영화가 끝나고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이유는 바로 그 느림 속에 담긴 감정의 밀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끝내 누가 진짜 ‘유령’인지 명확히 말해주지 않지만, 저는 오히려 그게 더 좋았습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의 존재감이 더 선명해졌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이름 없는 선택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지 모르거든요.
역사 속 수많은 무명의 인물들, 이름도 없이 스쳐간 사람들의 선택이 모여 오늘의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우는 영화였습니다. 유령은 조용했지만, 그 침묵이 오래도록 울림을 남깁니다.
영화 유령 FAQ 궁금한 질문 모음
Q. 영화의 가장 긴장감 넘치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A. 호텔이라는 폐쇄된 공간 안에서 인물들이 서로를 의심하며 눈빛을 주고받는 장면들이 가장 긴장감을 높였습니다. 특히 말 한 마디 없이도 분위기가 숨 막히게 흘러가는 대목에서는 대사보다 침묵이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Q. 이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가 주는 인상은 어땠나요?
A. 박차경과 유리코는 전통적인 스파이 영화에서 보기 어려운 복합적인 여성 인물입니다.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인간적인 고뇌를 드러내는 모습이 인상 깊었고, 단순한 기능적 캐릭터를 넘어서 서사의 핵심 축을 이끌고 있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Q. 유령 이 전하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A. 저는 이 영화가 '기억되지 않는 이름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 조용히 사라져간 존재들을 조명하면서 결국 어떤 시대든 침묵의 저항이 가장 오래 남는 울림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