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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수 포스터

 

1970년대 후반, 한국 사회는 산업화와 군부 권위주의가 겹치던 시대였습니다. 영화 《밀수》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바다 속에서 숨을 참으며 살아가야 했던 여성들의 생존기를 독창적인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류승완 감독은 그동안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액션과 현실을 결합한 작품들을 만들어왔지만,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조용하지만 묵직한 이야기로 관객을 찾아왔습니다. 제가 밀수를 보며 가장 인상 깊게 느낀 점은 ‘여성’과 ‘바다’라는 두 키워드가 만들어낸 감정의 진폭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단지 스릴이나 범죄적 긴장감에 의존하지 않고, 인물 간의 복잡한 관계와 선택의 무게를 조심스럽게 들여다봅니다.

 

해녀, 밀수꾼이 되다.  물속에서 시작된 이야기

주인공 진숙(염정아)은 해녀입니다. 해녀는 당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생업 중 하나였고, 물질을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여성들의 삶은 지금보다 훨씬 고단하고 험했습니다. 그런 진숙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건 공장의 매연이 바다를 오염시키면서부터입니다. 더 이상 물질을 할 수 없게 된 그녀는 우연한 계기로 밀수 제안을 받게 되고, 그곳에서 오랜 친구이자 동료였던 춘자(김혜수)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밀수는 처음엔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밀수’라는 공간이 단순한 생계가 아니라 권력, 탐욕, 복수 등 인간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히는 장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지점이 영화의 중심이라고 느꼈습니다. 인물들이 점점 더 깊은 바다로 내려가는 것처럼, 이들의 감정과 상황도 갈수록 복잡해지고 위험해집니다.

 

여성의 연대와 균열 사이에서

밀수의 특별한 점은 주요 캐릭터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입니다. 남성 중심의 범죄물이나 스릴러에서는 쉽게 보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진숙과 춘자는 같은 바다에서 물질을 하던 동지이자 친구였고, 다시 만난 순간엔 적이 될 수도 있는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그들이 나누는 말과 침묵, 신뢰와 의심은 극 전체를 이끄는 감정의 축입니다.

김혜수는 그동안의 강한 여성 이미지를 이번에도 훌륭하게 살려냅니다. 춘자는 누구보다 현명하고 강인한 인물이지만, 그 안에 자리한 고독과 욕망은 그녀를 복잡한 인물로 만듭니다. 염정아가 연기한 진숙은 더 조용하고 묵직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늘 물속에서처럼 숨을 참고, 견디고, 버팁니다. 두 배우의 시너지는 단순한 대사보다 더 많은 감정을 전달하며, 저는 그들의 시선이 교차하는 장면에서 오래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류승완식 액션의 탈피, 현실과 감정으로의 접근

밀수는 겉으로 보기엔 장르영화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범죄, 추격, 배신, 긴장감. 그러나 류승완 감독은 전작들보다 한결 절제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밀도 있는 시나리오와 인물 중심의 전개는 액션보다 감정에 더 무게를 둡니다. 저는 이 영화가 과장 없이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큰 신뢰를 느꼈습니다. 어떤 자극적인 장면 없이도, 인물의 감정과 선택만으로도 충분히 서스펜스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는 진숙이 물속에서 짐을 끌어올리며 토해내는 숨소리였습니다. 그 순간이 이 영화 전체를 압축적으로 상징하는 듯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숨을 참아야 하는 사람들, 하지만 끝끝내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현실. 그것은 단지 해녀의 삶만을 상징하지 않고, 이 시대 여성들의 삶 전체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보였습니다.

 

잊힌 시대, 잊혀진 목소리를 다시 꺼내다

밀수는 단지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아니라, 그 시대 속에서 사라진 이름과 목소리를 다시 꺼내려는 시도처럼 느껴졌습니다. 산업화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이들이 삶의 자리를 잃고, 선택할 수 없는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특히 여성들은 법과 제도의 그늘에서 밀려난 채, 삶을 버텨야 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그들의 이야기를 그저 동정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엔딩에 가까워지며 춘자와 진숙의 관계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경쟁과 배신, 오해가 있었지만, 결국 그들은 같은 바다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다가 모든 것을 감췄다가도 끝내 드러내듯, 영화는 침묵과 감정을 수면 위로 끌어올립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남습니다. 단지 이야기의 결말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 너무 쉽게 지나쳐온 이야기들이 거기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 밀수 Q&A 자주하는 질문

Q. 기억에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어떤 부분이었나요?
A. 진숙이 홀로 바다에 들어가 밀수 물건을 끌어올리는 장면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습니다. 물속의 고요함과 그녀의 숨죽인 표정이 묘하게 대비되며, 단순한 작업이 아닌 ‘생존을 위한 몸부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짧은 순간에 이 인물의 삶 전체가 응축된 듯한 강렬한 인상이 남았습니다.

 

Q. 감독 류승완의 연출 스타일에 있어 이번 작품이 특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A. 이전에는 남성 중심의 서사와 액션이 중심이었다면, 《밀수》에서는 여성들의 복잡한 관계와 감정선에 집중한 점이 가장 눈에 띄었습니다. 정제된 리듬감과 캐릭터 중심의 서사가 어우러지며, 감정의 파고를 따라가는 연출이 인상 깊었습니다. 류승완 감독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Q. 어떤 관객에게 이 영화를 특히 권하고 싶으신가요?
A. 강한 이야기 흐름보다는 인물 중심의 서사를 즐기시는 분들께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여성 캐릭터의 독립성과 주체성에 관심 있는 분들, 혹은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인간 심리를 섬세하게 풀어낸 작품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만족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